법정스님께서 '말빚'을 남기지 않으시겠다고 한 말씀을 전해들었을 때, 참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깨달음'은 말로 전달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현재 의식으로는 말과 글을 통해 전달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영성 지도자는 이 때문에 결국 말로 먹고 살게 된다. 그러나 본래 언어는 불완전한 것이다. 하물며 이를 적어놓은 책은 어떠할까?
어찌되었든 뱉어놓은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인과율이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인과를 만든 이상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누구보다 이를 잘 인지하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한 인식 하에 '말빚'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것이다.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당연한게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다. 사실 위의 서술한 얘기들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인식만 있다면, 지극히 당연한 얘기인데도 사람들은 이를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 않은 듯 하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이란 매우 큰 사건이다. 법정스님 또한 이 때문에 미디어에서 크게 다루어졌다. 덕분에 사람들이 법정스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언에 따라 저서들을 절판시킨다는 내용도 같이 알려졌다. 관심은 생겼는데 그 관심을 해소할 수단은 희소해지고 있으니 가치가 더욱 올라간다. 이건 법정스님의 말씀과는 아무 관련 없는 그냥 경제 현상이다.
책을 소유하면 알게 될까? 단지 호기심을 채울 수 있을 뿐이다. 무언가를 깨닫고 못깨닫고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문제이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단지 그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을 뿐이다.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 생전에 그 분이 가졌던 뜻을 다시 되새기고 기리고자하는 마음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은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정말로 법정스님께서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 깨닫는다면, 오히려 조용하게 그 분을 잊어주는게 도리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게 이해가 안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고인을 기억해주고,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쉬워하는게 맞는 것이니까. 근데. 그건 사실 유교적 가치관에서나 맞는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무의 자리에서 본다면, 그냥 하나의 자연 법칙이 실행된 것 뿐이다.
정말 중요한 건.
돌아갈 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 이러한 것들을 알고 가느냐. 모르고 가느냐. 이다. 법정스님의 뜻을 정말로 기리겠다면, 그것을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책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진리를 깨우쳐야 한다. 그게 진짜다.


